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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꺼진 가로등이다, 더 이상 비추지 못해도 누군가의 길을 지키고 있다

2025. 5. 2.

나는 꺼진 가로등이다. 한때는 이 거리를 환히 비췄다. 해가 지고 어둠이 골목마다 내려앉으면, 나는 불을 밝혔다. 사람들이 귀가하는 늦은 밤, 혼자 걷는 발걸음 위로 내 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. 누군가는 나를 보고 안심했고, 누군가는 나를 지나칠 뿐이었지만, 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그들을 바라봤다.

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. 전선 어딘가에서 끊긴 회로 때문인지, 내 불빛은 꺼졌고, 나는 조용히 어두워졌다. 아무도 나를 고치러 오지 않았다. 대신 내 아래에는 쓰레기가 쌓였고, 나를 지나던 사람들도 이젠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. 나는 빛을 잃은 채, 그저 ‘고장 난 무언가’가 되었다.

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.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를 가만히 지켜보고, 늦은 시간 누군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 눈길을 준다. 나는 더 이상 빛을 낼 수 없지만, 여전히 이 거리의 일부로 존재한다. 나의 그림자는 이제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감싸는 쪽에 가까워졌다. 어두움 속에서조차, 나는 이 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.

한 아이가 내 밑에서 우산을 펴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.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, 그 작은 존재가 무섭지 않도록 조용히 거기 서 있었다. 어쩌면 그 아이는 몰랐을 것이다. 자신을 비추지 못한 가로등이, 한때는 얼마나 밝았는지. 그러나 나는 괜찮다. 알아주지 않아도, 누군가를 위해 존재했던 기억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.

나는 꺼진 가로등이다. 더 이상 불을 켜지 못하지만, 나를 지나던 사람들의 뒷모습, 고요한 밤 공기, 흔들리는 마음들을 여전히 기억한다. 나는 빛이 없을지라도, 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만은 놓지 않는다.